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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의 모든것

등산의 역사, 험난한 대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by 백만요정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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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등반
에베레스트를 등반중인 등산가들

근대 등산의 여명기

등정을 목적으로 산봉우리에 오른 최초의 기록은 1492년 프랑스 알프스의 봉우리 'Mont Aiguille' 등정입니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시종이 왕의 명령을 받고 등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후 1786년 8월 몽블랑의 첫 등정이 성공하게 됩니다. Michel-Gabriel Paccard와 그의 포터가 주인공입니다. 두 사람은 2,392m 높이에서 잠을 자고 고산병과 동상 등의 증상에 시달리면서 등반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이 사용한 용구는 간단한 방한복, 기압계, 온도계 등의 기구와 약간의 식량이 전부였습니다.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이들이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정복한 진정한 선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몽블랑 등정 이후 알프스 등정의 신세계가 열립니다. 세계 등산 기록에서는 1854년부터 1865년까지를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라고 부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이에 149개의 알프스 봉우리가 등정되었습니다. 순수 등산을 뜻하는 'Alpinism'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절입니다. 알프스의 황금시대는 단연 영국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은 1857년 12월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The Alpine Club'을 창립합니다. 산악회의 명칭에 영국이라는 국명을 넣지 않았을 만큼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영국 산악회의 뒤를 이어 차례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산악회를 창립하게 됩니다. 19세기 알프스에서 수많은 등정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각국 산악회들의 경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인의 화려한 등정 성공 뒤에는 현지 가이드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현지 가이드들의 활약은 초기에는 미진했으나, 점차 기량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알프스 황금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등정이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이루어 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에서 등산을 즐기는 대부분이 부유층으로 알프스 가이드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었지만 다른 유럽국의 등산은 대중적이고 중산층 계급이 주로 즐겼기에 가이드까지 고용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벅찼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이드 없는 등반이 발달하게 되었고 단독 등반도 불사하는 도전이 감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단독 등반가는 오스트리아의 Georg Winkler를 꼽을 수 있습니다.

 

Mummerism(머메리즘)의 등장

 

 

마터호른의 등정으로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동안은 정상 등반이 목적이었으나 이후부터는 더 어렵고 새로운 길을 통해 오르는 방식에 관심이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1881년 등반가 Mummery에 의해 탄생한 Mummerism은 능선 등반에서 벽을 타고 오르는 벽 등반으로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Mummery는 산에서 한계에 도전하는 순수 등반을 중시했습니다. 덕분에 알피니즘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오늘날의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암벽등반, 빙벽등반의 행동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Mummery가 저술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에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의 황금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말라야 원정이 개방되자 8,000m 봉우리 등정을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10위의 높은 봉우리인 안나푸르나가 1950년 첫 등정 된것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전 정찰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정상 등정을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이 성공의 밑바탕에는 프랑스 원정대의 강력한 팀워크와 최신 장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 이후 개발된 최신 섬유인 나일론으로 만든 텐트, 비옷, 로프 외에 각종 경량화 장비를 총동원하였습니다. 하지만 팀의 대장인 모리스는 동상에 걸려 하산 후 손과 발을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영국의 9차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름으로서 그들의 오랜 염원을 풀었습니다. 1921년부터 도전을 시작해 9차례 만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산이 최고봉으로 발견된 지 근 10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산은 영국에서 측량 활동에 공인 큰 측지 학자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8,000m 산중에 가장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의 세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K2는 1954년 이탈리아 원정대에게 정상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초등정의 영예를 성취하려고 전 국민의 성원과 막대한 국고 보조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했습니다. 40여 일간의 고생 끝에 등정에 성공한 후 원정대는 팀워크를 존중해 등정자 두 사람의 이름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정자의 이름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차례로 등정에 성공하면서 기존의 등반 방식에서 벗어나 개척 등반이나 거벽 등반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황금기에 성행했던 대규모 등반이 소규모 경량 등반으로 바뀌고 무산소, 속도 등반, 단독 등반, 연속 등반 등 커다란 변화하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 1994년 경남 산악연맹 팀이 남벽을 뚫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1974년에는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여성 원정대가 그 주인공입니다. 1993년에는 한국 여성 원정대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게 됩니다. 고산 등반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한 알파인 스타일에 대해서 국제 산악연맹(UIAA)이 정의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등반 대원은 6명 이내

2. 등반용 로프는 팀 당 1~2줄

3.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등반대가 이미 설치한 고정 로프도 사용하지 않는다

4. 사전 정찰 등반을 하지 않는다

5. 지원조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6. 산소 기구를 휴대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슈퍼 알피니즘의 대두

높지 않지만 더 어려운 봉우리를 추구하려는 새로운 경향을 대표할 만한 등반이 1991년 히말라야의 탈레이 사가르 북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탈레이 사가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봉우리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등반 능력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상업 등반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21세기의 등산은 어느 산의 지리적인 정복이나 탐험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인가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1999년에는 네팔의 Babu Chiri라는  셰르파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무산소로 21시간 30분을 버티는 기록도 세웠으며 2000년에는 16시간 30분 만에 자신의 10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시키는 상상할 수 없는 기록까지 나왔습니다. 일본인 등반가 유이치로 미우라는 2003년 70세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2008년 75세에 또 한 번 정상을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등산 장비가 첨단화되고 많은 정보가 쌓이면서 등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의 고봉과 암벽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지속해서 이루어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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